창원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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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구씨 > 문중관련자료
 
작성일 : 13-08-10 17:58
仇復漢公 삶에 대해서(2)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998  
인간은 영물(靈物) 중의 영물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데 소개 하고자 하는 내용은 본인이
2007년 6월 3일 昌原仇氏 대종회 정기총회를 구천재(龜川齋)에서 마치고 이 날 저녁에 仇復漢
할아버지의 비석(碑石)이 꿈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날 종친분 중에서 창원시 북면 내곡리
도태에 구복한 할아버지의 묘소에 동행하고자 한 분이 있어서나 개인적인 일이 있어 함께 참석을
하지 못하고 창원 시내로 들어 왔었다.
이런 연고의 이유인지 이 날 밤에 꿈속에서 할아버지의 비석이 나타난 것이다.
꿈속에서 할아버지의 비석 주위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 눈에 보인 것이 비석에 仇復漢
節制使란 글귀가 선명하게 비석에 세겨져 있는데 궁금하여 옆에 있는 분에게 여기가 어딘지 문의를
하니 논산(충청도)이라 하였다. 하도 신귀하다는 생각을 하는 도중에 잠에서 깨어 났다.
이 이후에 하도 이상하여 북면 내곡 할아버지 묘소를 방문하여 참배를 하고 묘전(墓前)에 세워져
있는 비석과 문인석(文人石)를 세밀히 관찰하여 보니 문인석의 모자(관모 冠帽) 뒤쪽부분에
처음 보는 조각형상을 발견하였다. 관모에 대하여 궁금증이 더해 창원시내에 소재하는 서점에
가서 모자에 관련된 책을 찾고 있는 도중에 눈에 보인 책이 조선시대 관모 사전이란 책이
발견 되었다. 자택에 왔어 읽어 보니 관모는 바로 익선관(翼善冠)이었다.
익선관이란 왕과 왕세자가 평상복인 곤룡포를 입고 집무할 때에 쓰던 관으로 앞 꼭대기에 턱이져서
앞이 낮고 뒤가 높은데, 뒤에는 두 개의 매미 날개처럼 달았으며 검은빛의 사(紗) 또는 나(羅)로
둘렀다 옛 사람들은 곤충 가운데 매미를 가장 고고하고 신령한 곤충으로 생각하여 최고의 지덕을
가진 곤충이라고 예찬하였고 진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육운이라는 사람은 매미의 다섯가지 덕 즉
문(文), 청(淸), 염(濂), 검(儉), 신(信)을 칭송하였다. 그래서 왕(王)는 정사를 보기 위해 모자를
쓸 때 매미의 오덕을 생각하여 마음 가짐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익선관을 착용하였다.
조선시대 익선관을 착용할 수 있는 사람은 王과 王世子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익선관의 형상과 모양 그리고 매미의 사진은 아래와 같다.
그러면 왜 구복한 할아버지의 묘전에 세워져 있는 문인석에 익선관을 착용하고 있을까?
의문이 극에 달하여 생각에 잠겼다. 현재까지 알고 있는 구복한 할아버지의 관직은 전라도
병마도절제사(병마절도사) 종2품으로 알고 있는데 익선관을 쓰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창원 북면
내곡에서 출생한 통천최씨 최윤덕 묘소를 방문하기로 하고 반룡산(盤龍山) 아래에서 출발하여
북면으로 향하여 최윤덕의 묘소에 도착하여 문인석에 관모를 확인하니 역시 익선관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구복한 할아버지의 관직은 좌의정이란 말인가? 왜 또 신하가 익선관을 쓰고 있는지?
최윤덕의 최종 관직은 좌의정으로 알고 있는데 의문이 더욱더 생겼다. 그래서 지방지(地方紙)에
혹시 어떤 기록이 있지 않을까 싶어 수소문 중에 강진향교지에 아니나 다를까 최윤덕장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일련의 구복한공과 최윤덕장군의
문인석에 익선관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 이해가 가는 것이다. 왜야하면 조선초기에는
王世子는 정1품에 해당하였고 조선초기 이후에 무품(無品)으로 변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결론을
내려보면 구복한공과 최윤덕은 정1품인 영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것이 반증되는 내용이라 하겠다.
구복한공과 최윤덕공의 문인석에 쓰고 있는 관모의 익선관은 아래 그림과 같다.
더붙이면 창원구씨종회보 제37호 구복한공 삶에 대해서에서 설명한바와 같이 구복한공과 최윤덕의
묘전에 있는 문인석의 이마에 백호(白毫)가 동일한 형상으로 조각이 되어 있고 아래에 구복한공의
문인석의 이마에 세겨져 있는 백호를 촬영한 사진이다.(아래참조) 
역대로 창원지역의 관료 출신 중에서 정1품인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
(領議政府使)에 재임한 분은 구종길(仇宗吉 世宗大王 師傅, 文宗 師), 仇宗吉의 子 仇復漢과
최윤덕 등 인물을 배출한 지역이다. 그리고 仇宗吉公과 仇復漢公의 관직을 고려해 볼 때
조선시대에는 2품 또는 1품인 경우에는 君으로 봉군(封君) 제도에 의하여 어느 지명(地名)에
봉군으로 봉했을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이에 대한 기록을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단절이
된 것으로 생각되어 차후에 연구의 대상 중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의 해결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창원구씨 대종회 차원에서 발굴 조사를 시행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또 추후에 구복한공의 관직에 대해서 고찰을 하고자 하며 왜 꿈속에서 충청도 논산에 할아버지의
비석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차후에 조사를 할 계획이다.
그리고 구복한공의 관직 진출에 대해서 일설에는 음사(蔭仕 음직 蔭職)로 일설에는 문과로
기록되어 있으나 본인의 견해로 정리를 하여보면 구복한공의 첫 관직은 충청도 도사(都事 종5품)로
음사이며 이후 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한 것으로 사료된다. 음사로 첫 관직을 5품에 나아갈 수 있는
경우는 조선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자기의 父나 祖가 정1품에 있는 경우에 子가 5품에 임명된
기록을 확인할 수가 있다. 즉 구복한공은 구종길공이 영의정부사에 재임 중에 5품인 충청도
도사(都事)의 관직에 진출한 것으로 추정한다. 끝으로 창원구씨 종원님에게 건의 드립니다.
머리는 생각하고 마음은 느끼고 붓으로 생각했던 것과 느낀 것을 기록하여 스스로 깨우치고
아울러 후세가 읽어 보고 삶에 도움되게 기록을 소중히 여기고 후세에 전수가 될 수 있도록
강구(講究)합시다. 그리고 상기 내용 중에서 조선실록(세종대왕 실록)에 仇宗吉公과 仇復漢公에
대한 기록이 없는 시대적 배경은 창원구씨 종회보 제39호 仇宗吉公 삶에 대하여에 상세히
설명이 되어 있으니 참조 바랍니다.
   09년 10월 3일 오전 1시 29분  九谷門中(密城) 20世 仇仁鈺(淸臺亭)  - 끝 -.
   ==== 상기 관련 사진은 종회보 참조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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