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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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원구씨 > 문중관련자료
 
작성일 : 13-08-10 17:56
仇復漢公 삶에대해서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016  
仇復漢公 삶에대해서

人間은태어나서 成長하면서 가치관,인생관,역사관,종교관,생활관,정치관등에 대해서 어떤 思想의 형성과정을 거치면서 삶을 영위하다 인생의 종착지인 죽음으로 육체는 사라지고 사상은 그사람이 죽음의 후에도 타인에게 영향을미친다.
復漢公의 삶 또한 생존시대나 사후에도 다른
사람에게 많은영향을 주었다.
지금까지 알지못했던 개인역사의 사실에 관해서 설명하고자한다
.

먼저복한공의 字는 象佰이요 창원시 북면 내곡리도 태에서 태어나시고 忠淸都事,江界府使,全羅兵馬節度使을지냈다.
忠淸道는 오늘날 충청남도,충청북도를 합쳐부르는 명칭이며
호서지방(湖西地方)이라거도한다.
삼한시대(三韓時代)에는 마한(馬韓)의 영토였으나 삼국시대
이후로 행정구역 명칭이 많이바뀌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995년(성종14년)남·북도를
중원도(中原道)·하남도(河南道)라하였고, 1106년(예종1년) 이를 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
州道)라고 함으로써 처음으로 충청도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1172년(명종2)중원,하남을다시
나누어충청도라하였고,1314년(충숙왕1년)에 양광도라고 부르다가 1356년(공민왕5년)에다시
충청도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들어서서1395년(태조4년)양광도에 소속된 군현을나누어경기도와
충청도에부속시켰고충주(忠州)에관찰사를두었다. 1413년(태종13년)군현을크게변경하여 충청도에 4목(牧) 12군(郡) 38현(縣)을 두었으며,그뒤로충공도(忠公道),청공도(淸公道),
홍충도(洪忠道)등으로 명칭이 연속적으로바뀌다가, 1834년(순조34년)에다시충청도가되었다.
 
조선초기부터 명칭과 관계없이 좌·우도(左右道)로나누어 부르던것을 1896년(고종33년)전국 행정구역을 13도로나눌때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로 나누어 현재와 같은행정구역이되었다.
강계부(江界府)는 평안북도 북동부에 있었던 군으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데, 지명는 지형에서 유래가 되었고 북쪽으로 자성군,북동쪽으로 후창군에 접하고,북서쪽으로 압록강 상류를 넘어 중국의 둥베이[東北]지방과 마주하며,서쪽으로 위원군,초산군,남쪽으로 희천군,
동쪽으로 함남장진군과 접한다.
1949년12월강계군 강계면 이강계시로 승격되고 강계군의나머지
지역은 장강군으로개칭되었다.
대부분이 산악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산맥 사이에서 발원하는 작은
내를합친 독로강(禿魯江)이 북쪽으로 흘러 위원군을 거쳐 압록강으로 들어간다.평야는 압록강과
독로강 유역의 좁은평야와강계분지가있다.
전라도(全羅道)는지금의전라남도,전라북도를 합하여 일컫는 명칭으로 全羅는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첫글자를합하여 만든 지명으로, 고려현종때 전라주도(全羅州道)에서 비롯되었다.
 마한의땅으로 백제의 영역이었다. 660년(의자왕20년)백제가 망한뒤 당(唐)나라 영토로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소속되었고, 당나라군사가 철수한뒤 신라경덕왕은 전주와
무주(武州)에 2개의 도독부를 설치하여 관할하였다.
진성왕때부터 견훤에 의해 후백제의 근거지가
되었고,936년(태조19년)고려가이곳을차지하였다. 성종때 강남도(江南道)와 해양도(海陽道)로 나누어졌는데,현종때 이를 합쳐 전라주도라 하였고,
조선시대 부터 전라도라 하였다.
인조때 전남도라고 하였다가 복구된뒤, 다시 광남도(光南道)로
고친적이 있다.
영조때 전남도로 고쳤다가 복구하였다.1895년(고종32년) 4개부로 나누었고,
1896년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로 나누었다. 1914년 전라북도 1부14군,전라남도1부22군으로
통폐합 되었다가 1946년 제주도가 전라남도에서분리되었다.
1986년광주시가 직할시로 승격,
1995년광역시로 변경되어1개광역시와2개도로나뉘어졌다.
復漢公은 3개지역에서 관직생활을 하였고 碑文에 의하면 강계에는 거사비(去思碑)가 있다했으니 거사비(去恩碑)는 고을 주민들이 딴데로 갈려간 감사(監司 :관찰사)나 수령{守令 :조선시대에 각고을을 맡아 다스리던지방관,목사,부사,군수,현감,현령등}의 선정(善政)을 기리기위해
세운비를 말한다.
이것을볼때 復漢公의 牧民官으로 在任時 人間美를 일부분을 알수가있다.

복한공은 文官으로 전라병마절도사(종2품)을 역임 한것으로 보아 文과 武에 능한인물로 사료된다. 전라병영성지는 사적제397호로 1997년 4월18일에 지정되었고 소재지는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에 있으며 규모는약30,000평이며 조선시대 1417년(태종17년)부터 병영지로 자리를 잡았다.
전라병영성은 조선조500여년간 전라도(전남과전북)육군의 총지휘부였던곳으로 1417년(태종17년)에 원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강진으로 이설한것이다.
초대병사인 마천목장군이 축조한것이며, 꿈속에 계시를 받아서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 하였다고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남북으로 약간 긴장방형이며, 총연장은 1,060m이다. 1599년(선조32년)에도 위수 권율의 상소로 일시 장흥으로 이설 되었다가1604년다시 당초의 위치로 옮겨왔으며, 제주도에서 표류중이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8여년 동안을 억류되어 있기도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는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32년)복구가되지못하고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3월9일 전라남도 기념물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관리되어오다가 1997년 국가사적으로 다시 지정되었다.
시간적여유가 있는 宗員분은 방문을 하여복한공의 옛정감을 느껴보는것도 좋을것이다.
다음은 현재까지 復漢公에 대한기록으로 전혀 볼수없었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시대에는 生前에 관직에 역임했던 官品에 따라사 후의 墓前에 석물을 세우는 내용을 달리 규제하였다. 여기서 상세내용은 생략하고 文人石에 대해서 알아보면다음과같다. 문인석(文人石)는무덤앞양쪽에각1개식세워놓은문관(文官 文臣)의형상을돌로만들어세운
것을말한다.
복한공의墓 앞에 양쪽에 각1개식 문인석이 세워져있다.
아래의그림을 보면 알
수가 있고 이문인석에 얼굴을 세밀히 살펴보면 눈섭사이에 백호(白毫)가 조각 되어있다.
백호는 불타의 32상(相)의 하나로 경전에는 불타의 신체상의 뛰어난 특색을 표시하는 32상이 기록되어있는데, 백호도 그중의 하나이다.양 미간에 있으며 오른쪽방향으로 돌며 오그라진 매우
가느다란 흰털인데,이것이 광명을 발함으로써 삼천세계(三千世界)를 비춘다고 되어있다.
여래에
국한하지 않고 보살도 백호를 갖추고 있으며,초기의 불타상에 이미 작은원형이 양미간에 부조되어 있다. 조상(彫像)을 제작할경 우,양미간에 구멍을 뚫어수정,진주,흰색을 칠한 나뭇조각등을 박아 넣어 만드는것으로 알려져있다.
복한공의 묘앞문 인석에 백호가 조각되어있다는것은 복한공이 生前에는불교의 佛子로보아야 할것이며 문인석에 이와같이 백호가 조각되어 있는것을 보아 死後에도 불교인으로 석가모니를 思慕한 여력이보인다. 지금까지 국내의 문인석과 무인석에서 보지못한 백호조각형상의 내용이다. 참고적으로 석가모니에 대해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석가모니(sakyamuni?∼?)은 불교의 창시자이며 생몰년에 관해서는 BC463~BC383년 설과 BC563~BC483년 설이있다. 네팔남부가 인도 대평원으로 이어지는 위치에 있었던 카필라성(Kapila城)을 중심으로 사카족의 작은나라가 있었는데, 그국왕인 정반왕(淨飯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석가라는 호칭은 이종족 이름에서 연유되며, 존칭하여 석가모니라 불리는데,석존(釋尊)이라고도
한다.
성은 고타마,이름은 싯다르타이다.흔 히 각자(覺者 :깨달은사람)를 뜻하는 보통명사를
고유 명사화하여 불타(佛陀;Buddha)또는 불(佛)이라하며, 다시여래(如來;진리의완성자) 또는 승자(勝者;Gina)라하기도 한다. 80년의 생애는 분명한데,몰년에 관해서는 BC483년 무렵과
BC383년무렵의 2가지설이 유력하다.
사카족은 네팔계, 따라서 몽골계 인종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나,당시 이미 압도적인 인도 아리아 문화영역내에 있었음은분명하다.19세기에는 계몽사상등의 영향 때문에 석가의실제 존재에대해 의심을 품기도했으며,천문학상의 여러설과 태양신화를 근거로 석가의 전기를 설명하는 학자도 있었다.
1898년네팔의 남쪽 국경에서 하나의 납석단지[蠟石壺(납석호)]가 발견되었는데, 그표면에 새겨진 BC3세기 이전의 글은"이것은 석가족의불(佛),세존(世尊)유골의 그릇이며,명예로운 형제자매 처자들의 봉납(奉納)"이라고 해독되었다 .이는 원시경전의 내용과 일치하기때문에 오랜 전승이
여기서 확증되었다.
그밖에 1896년에 발견된 아소카왕 비문은 석가의 탄생지 룸비니를 증명하며,
후에다른뼈단지[骨壺(골호)]를발 굴한것도 있으니,석가의 실재(實在)는 움직일수없는것이
되었다.
오늘날의 문헌학을 종합한다면 가장 오래된 경전은 석가의 손제자(孫弟子)무렵에
성립했다고 한다.즉 석가 입멸직후에 불제자가 모여서 석가의 언행을 편집(이를제1결집이라함) 하여 그것이 구송전승 되었고, 또한 확대되었다. 시대의 경과와 전파과정에서 잘못전해지고
분식 되었으며,또한증광(增廣) 및 변경되기도 하였다.
특히 석가에 대한 사모·존숭·신앙이
강화되어 석가를 신비화하고 공상화했으며, 때로 잡다한 요소가 부가되었다.또한교설(敎說)도 나중의 발전성과와 뒤섞였다.
현재 전해지고있는 초기경전은 모두석가의 입멸후100년~200년무렵에 교단이 보수파인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하고 다시 여러갈래로 분열한끝에 성립한 20여개 부파중 몇개부파에서 확정한것인데, 석가의직 접적가르침을 가려낸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일이다.
석가는 마가다어로 가르침을 전했을것으로 추정되며,마가다어는 팔리어와
표준어인 산스크리트로 바뀌었고,산스크리트는 다시 다른 속어(예컨대간다라어등)로옮겨졌다.
또한 많은것이 한문으로 번역되었으며, 일부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었다. 또한 일부이기는 하지만 위의 고어사본단편이 여러지역에서 발견되었다. 마가다어는 팔리어문헌에 조금 그어형을 남겼을뿐이고,마가다어의 종합된 텍스트는 현존하지않는다.
이초기경전들을 아가마(agama;傳來)라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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