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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년 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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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리탐구 > 역대인물사


新羅時代人物(신라시대인물)

구 진(仇 珍) : 551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 성왕의 도움 요청을 받자,   구진 장군을 보내어 백제가 고구려에 빼                      앗긴 한산주(지금의 서울)를 탈환하여 백제에 주지 않고 신라의 영토로 삼았다.

구 근(仇 近) : 661년 라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는데  필요한 식량을  소정방 군단에 전달하는 과정에 혹                      한에도 불구하고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구려군과 대전투(大戰鬪)를 하여 대파하자,                      왕은 구근 장군을 사찬(沙湌)으로 승진시켰다.

구 기(仇 杞) : 668년 라당 연합군이 고구려의 평양(平壤)을 총공격할 때 평양남교(平壤南僑)를 적시(適時)에                      점령하여 평양에 대 군대가 상육할 수 있는 길을 마련했다. 술간(述干)의 벼슬과 율(栗) 700석                      을 하사 받았다.

구진천(仇珍川) : 668년 사찬(沙湌)밖 목표물에 명중시키는 쇠뇌(활)를 만드는 유명한 노사(弩師)로 라당연합                          군이 이 쇠뇌를 사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여 승리했다. 전쟁이 끝나자 당나라에 불려가서 당                          나라 고종의 명령을 무시하고 끝까지 제작하기를 거부했다.

구족달(仇足達) : 벼슬은 사찬(沙湌) 신라말기에서 고려 초기에 명필가 940년에 건립한 보현사 탑비(보물192                          호)에 쓴 강한 필력을 볼 때 신라 김생(金生) 이후에 최고 명필가(名筆家)로 인정 받고있다.

 

高麗時代 人物(고려시대 인물)

구성길(仇成吉) : 자(子)는 완지(完之). 창원구씨 원시조(原始祖)이다.  고려 혜종(惠宗)2년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에서 공을 세워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의 벼슬을 받고  의창군(義昌君)에                          봉(封)해 지셨고, 의창(義昌:지금의 창원)을 식읍(食邑)으로 받으셨다.  묘소는  재영월부 남                          십리허 취봉경태용경좌(在寧越部 南十里許 鷲峯庚兌龍庚坐)라 하나 묘는 실전상태다.

구 희(仇 喜) : 자(字)는 군열(君悅). 부친에 이어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셨다.

구 경(仇 景) : 자(字)는 여앙(汝仰). 수안현감(遂安縣監)을 역임했다.

구 염(仇 廉) : 자(字)는 자순(子順). 참봉(參奉)을 지내셨다.

구 설(仇 雪) : 자(字)는 숙경(肅卿). 고려조 생원(生員), 배(配) 강진김씨 부 을룡(乙龍)


朝鮮時代 人物(조선시대 인물)

구종길(仇宗吉) : 호(號)는 천곡(川谷).  1422년 세종4년 과거 정시(庭試)에 장원(壯元) 급제하고 일년이 지나                          도 고향에 가지 못하고 어머님 생각에 병이 났다.   드디어 왕이 휴가를 보내면서 명주(明珠)                          한알을 표신(標信)으로 하사했다.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을 지내다 나중에 사부(師                          傅)가 되셨다. 이 이야기는 조선역대명신록(朝鮮歷代名臣錄)에 있다.

구복한(仇復漢) : 부사공파파조(府使公派派祖)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충청도도사, 강계부사(江界府                          使),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강계부사 시절 백성들이  복한(復漢)공                          의  은덕(恩德)을 칭송(稱頌)하며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이 이야기는 교남지(嶠南誌)에                          있다.

구석종(仇碩從) : 자(字)는 예원(禮元). 성종조(成宗朝)때 의성훈도(義城訓導) 통선랑(通善郞)을 역임하셨다.

구순종(仇順從) : 성종조(成宗朝)에 진사(進士)를 지내고 그 후손이 번창하여   사남면(泗南面) 능화(陵花)에                          집성촌(集成村)을 이루고 있었다.

구동직(仇東直) : 자(字)는 여방(汝邦).  승지공파파조(承旨公派派祖),  조선조 초기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                          旨)를 지내셨다.

구유온(仇有溫) : 호(號)는 하계(荷溪). 중종(中宗) 8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1542년 중종 37년 밀양부                          사 박세후(朴世煦)의 청으로 밀양영남루(密陽嶺南樓)에 상낭문(上낭文)을 지으셨다. 밀양징                          신록(密陽徵信錄) 및 중요 향사(鄕史)에도 기록이 있다.

구선달(仇善達) :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창원사곡리(昌原斜谷理)에서 경기도 이천 송라로 가족과 함께 이사를                          하시고, 그 곳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구자평(仇自平) : 호(號)는 월정(月亭).  단종(端宗) 2년 과거(科擧)에 급제하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                          錄)에 의하면 선전관(宣傳官)으로, 함길도도사(咸吉道都事),  이시애(李施愛) 난(亂)에 남이                          장군과 같이 출정(出征)하여 함길도문천(咸吉道文川) 주둔(駐屯) 사령관,  예조정랑(禮曹正                          郞), 성종(成宗) 때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로  어전회의(御前會議)에 참석하여  임사홍                          (任士洪)을 탄핵(彈劾)하여 처벌하자는 발언이 회의록으로 왕조실록에 있다.

구인복(仇仁福) : 일휘 자설(自雪). 중종조(中宗朝)에 어모장군(禦모將軍) 및 안일호장(安逸戶長)을 지내셨다.                          담양군(潭陽郡) 천동문중(泉洞門中)이다.

구수겸(仇守謙) : 자(字)는 익지(益之). 중종(中宗)20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전주훈도(全州訓導)를 지                          내셨다.

구수영(仇守榮) : 선조조(宣祖朝)에 장사랑(將仕郞), 강예습독관(講隸習讀官), 시거(始居) 황해도 안악(安岳),                          처사공파(處士公派)

구진립(仇震岦) : 자(字)는 현맹(見孟). 중종조(中宗朝)에  훈련원 첨정(僉正) 및 천견강제록도(天譴降除鹿島)                          만호(萬戶)를 역임하셨다.

구자범(仇自範) : 자(字)는 사장(士章). 중종조(中宗朝)에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교하(敎河) 현감(縣監)                          을 역임하셨다.

구 협(仇 協) : 자는 공직(公直). 명종조(明宗朝)에 부호군(副護軍)이었다.  풍천임씨세보(豊川任氏世譜) 인명                      록에 구협(仇協)을 사위로 수록되어 있다.

구 서(仇 恕) : 자(字)는 군화(君和). 1516~1577 명종조(明宗朝)에 생원이 되었고  통정예조참의(通政禮曹參                       議)를 증직(贈職) 받으셨다.

구응진(仇應辰) : 호(號)는 청사(淸沙).  제포만호(濟浦萬戶) 명종(明宗)6년 1551년 출생하여, 선조(宣祖) 16                          년 계미별시(癸未別試)에 급제  수군기지사령관(水軍基地司令官)으로  임진왜란이 발발(勃                          發)하자 김해 노현(露峴)에서 왜적과 치열한 해전을 하다 전사했다. 그의 충절을 포상(褒賞)                          하여 선무원종곤신(宣武原從功臣) 2등 훈(勳)에 올랐다.   조선역대명신록에 자세한 설명이                          있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 “일문사충(一門四忠)”을 순의기적비(殉義奇蹟碑)에 새겨                          넣었다.

구응삼(仇應參) :호(號)는 충모당(忠慕堂).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이었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금군(禁                         軍)이 되어 왕을 호위하며 때로는 가까이 다가오는 왜 적과 전투를 하여 많은 전공을 세워 선                         무원종공신록 1등훈(一等勳)을 받으셨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 “일문사충”을 받으셨다.

구응두(仇應斗) : 정사보(丁巳譜) 휘(諱) 두전(斗專)   1578~1620 선조조(宣祖朝)에 통덕랑(通德郞)을 지내셨                          다.

구응성(仇應星) : 호(號)는 송은(松隱). 훈련원 주부(主簿)로 임진왜란이 터지자 향리로 돌아와 단신(單身)으로                          창의(倡義)하여 적진에 뛰어들어 전투를 하자,   고을사람들이 감동하여 부하로 모인 사람이                          수 천명이 되었다. 그 길로 곽재우 장군진영에 합류하여 전투를 했다. 곽재우 및 권율장군의                          포상상신(褒賞上申)으로 선무원종공신 2등훈(二等勳)을 받았다.   조선역대명신록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휘호(親筆揮毫)  “일문사충(一門四忠)”을 기적비에 새                          겨 넣었다.

구 동(仇 棟) : 호(號)는 모의당(慕義堂). 응성공의 아들로 21세에 부친을 따라 의병(義兵)으로 창의(倡義)하여                       곽재우 장군 진영에 들어가서 적을 토벌(討伐)하고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곽장군은 세 번이                       나 포상(褒賞)을 상신했다. 조선역대명신록, 고성읍지에 사연이 기술되어 있다. 박정희 대통령                       친필휘호 “일문사충(一門四忠)”을 기적비에 새겨 넣었다.

구영취(仇榮鷲) : 임진년 4월14일 왜병이 부산진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동래성으로 달려가 여러 의                          병들과 합세하여 왜적들과 혈전을 치뤘으나 중과부적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여러 의병들과                          같이 소산역구에 집결하여 동래와 양산 사이의 수송로를 차단하는 유격전으로 선무원종공신                          3등훈(三等勳)을 포상받았다.  동래성 혈전에서 장렬히 순직한 동래부사 송상현과 더불어 충                          열사(忠烈祠)에 배향(配享)되어있다.

구 변(仇 忭) : 참사(參事).  임진왜란이 터지자  즉시 창의(倡義)하여 참전(參戰)하고 큰 전공을 세우니 선무원                      종공신 3등훈(三等勳)을 받으셨다. 이천문중이다.

구 흔(仇 忻) : 보인(保人:正軍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사람) 형 변(忭)과  같이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참전하여                      그 전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 3등훈(三等勳)을 받으셨다.  이 사실이 명신록에 수록되어 있                      다.

구윤걸(仇允杰) : 자(字)는 정순(正順). 1574~1605 선조조(宣祖朝)에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응진(應辰)공                          의 장남이다. 고종(高宗) 병오년에 통정밀서원승(通政密書院丞)을 증정(贈呈)받으셨다.

구정열(仇廷說) : 호(號)는 연기(烟磯).  국조방목(國朝榜目)에 의하면 선조(宣祖)5년에 과거에 급제하셨고, 문                          장력과 필법의 오묘함을 보시고 칭찬하면서 충청도 도사(都事)로 제수되셨다.  얼마 후 옥당                          교리(玉堂校理)에 세자의 사부로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날것을 예측하여 대비책 강구를 주                          장 하다 받아 지지 않자 은퇴(隱退)했다.  말년에는 가선대부 예조참판(禮曹參判)을 증직(贈                          職)받으셨다.

구정려(仇廷呂) : 호(號)는 봉암(鳳巖). 조선왕조신록을 보관하고 있는 경기전(慶基殿) 참봉(參奉)으로 재직시                          임진왜란이 터졌다 동지인 안의(安義) 손홍록(孫弘錄)등과 협의하여   조선왕조신록을 정읍                          (井邑) 내장산 용굴암(龍屈菴)으로 옮겼다. 다시 묘향산으로 옮기기도 하고, 후일 다시 본전                          (本殿)으로 옮기었다.

구 지(仇 之) : 시호(諡號)는 문열공(文烈公). 옥당교리 정열(廷說)의 차자이다. 전주판관(全州判官)을 거쳐 나                      주목사(羅州牧使)로 재직 시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지역에서 군졸(군졸)을 모아서 창의(倡義)                      하여 왜적들과 혈전을 치르며 곳곳에서 큰 전과(戰果)를 세워 선무원종공신 일등훈에 포상되셨                      다. 후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使)를 증직                      (贈職)받으셨다.

구일생(仇逸生) :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5년만에 순절(殉節)하니  통훈사헌부지평(通訓司憲府持平)을 증                          정받으셨다. 성주(星州) 벽진문중(碧珍門中)이다.

구 용(仇 龍) : 임진왜란에 영면주(領綿紬)에 나가 선조왕을 극진히 보살피자 다른 사람의 열배나 되는 공로가                      있다고 하시면서 비변사(備邊司) 수첩(授帖)에 실렸다.

구연용(仇淵龍) : 자(字)는 이현(而見). 고성군 회화면 화양리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화둥재에 봉위하고 있다. 회화문중(會華門中)이다.

구경남(仇景男) 구경운(仇景運) : 1658년 효종(孝宗) 9년(순치(順治) 14년)  계후등록(繼後謄錄)이란 양자입                        양을 허가를 받는 제도로 이천문중(利川門中) 10세손 이준(以俊)공이 후손이 없어 계자를 신                        청하여 동의를 받은 예조편(禮曹篇)의 문서로서 문장 통정대부 구경남과 첨사 구경운이 신청                        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 김차지가 승낙한 문서이다.

구석린(仇錫麟) : 영조(英祖) 19년 생여각(生閭閣)의 영이 내렸다. 고산군수에게 보내는 글에 천만 뜻밖에 정                          표(旌表)의 공문과 관청의 곡식이 이미 도착하니, 황송하여 몸 둘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황공하고 부끄러워 표창의 은전(恩典)을 거두게 하여 주시옵소서 라는 글을 써 관청에 보냈                          다.

구용진(仇龍進) : 호(號)는 불지암(不知菴). 1712년 8월 숙종(肅宗) 38년 15세에 반월시(半月時)등 시 두편을                          남겼다.

구흥생(仇興生) : 자(字)는 이태(爾泰). 1618년~1697년 인조조(仁祖朝)에 무과에 급제하고 부호군(副護軍) 및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증직(贈職)받으셨다.

구처형(仇處亨) : 자(字)는 통여(通汝).  1678~1760 숙종조(肅宗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장락원(掌樂院) 첨                          정(僉正)을 지내셨다.

구주성(仇周星) : 어릴 적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부친께서 병이 전염되어 기절하였을 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따라드리니 소생하였다. 1670년 현종(顯宗) 11년 이 사실을 듣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동래읍지(東來邑誌)에 그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구학령(仇鶴齡) : 공 배위(配位) 진양강씨 열행기(烈行記:영조조에 있는 열행기).  죽은 남편의  부인을 미망인                          (따라죽지 못한 사람)이라 한다. 그러나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을 아니다.   학령공의 빈소에                          서 밤을 세우고 상여가 떠난 후 목욕하고 새옷 갈아입고 목숨을 끊었다.   열행기가 고성읍지                          (固城邑誌)에 있다.

구상덕(仇尙德) : 호(號)는 월봉(月峯). 1706~1761 영조조(英祖朝)에 월봉서월을 세우고 후배양성에 진력하면                         서 제목을 승총명록(勝聰明錄)으로 하고 수십년간 일기를 쓰셨는데,  그 시대의 생활상, 일반                         평민들의 문화가 풍속,  금전 거래 등  그 시대의 다양한 자료가 보존가치가 크다고 인정되어                         한국정신문화원에서 국역(國譯)하여 보존하고 있다.

구태종(仇泰琮) : 1762년 영조(英祖) 38년에 최초의 창원구씨 족보 임오보(壬午譜)를  주간하여  편찬(編纂)했                          다.  그 때 창원구씨(昌原仇氏)를 임오보(壬午譜)가 있으므로 우리의 뿌리  창원구씨(昌原仇                          氏)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계기(契機)를 마련하셨다.

구세정(仇世貞) : 자(字)는 상운(祥雲).  영조조(英祖朝) 1695~1757.  가선동추(嘉善同樞)를 증직 받았다.  배                          (配) 신악주씨는 천성순효정신하여 향토유림에서 효행상 당주장을 증정받으셨다. 배 신안주                          씨는 천성순효정신(天性純孝貞信)하여  향토유림에서 효행상 당주장(棠주狀)을 증정 받으셨                          다. 시부님을 극진히 보살핀 이야기는 교남지(嶠南誌)에 있다.

구봉익(仇鳳翼) : 1680~1770 졸.  1761년 영조(英祖) 37년에 족계절목(族契節目)을 만들고  족계문장(族契門                          長)이 되었다. 족계절목이란 오늘날 종친회 회칙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족계문장이란 종친                          회회장이다. 특히 묘사에 관한 관심과 경비조달 방법이 절목에 들어있다.

구세안(仇世安) : 전라도 담양부 천동면(泉洞面)  무송(茂松) 황윤석의 필본 저서  “이재유고”에 의하면 창원구                          씨 임오보에 입보한 후손이라고 했으며 창원에서 이사왔다는 내용도 포함되어있다.

구명신(具命新) : 자(字)는 현보(顯甫).  1777~1842  김해지에 이르기를 효행이 깊어 어버이가 병들어 아플 때                          눈속에서 특이한 뱀을 얻었고 섣달이 지난 후에 생감을 구해 공양하였다.

구시창(具始昌) : 정조 15년(1791) 7월  금위조직(禁衛組織)인 장용영(壯勇營) 초관(哨官) 후보로  훈련도감집                          사(訓練都監執事)인 구시창(具始昌)이 올랐는데 정조왕이 보시고 구씨성(仇氏姓)이 오래되                          기는 하였으나 구씨성(具氏姓)이 좋으니 고쳐 쓰라고 했다.  그해 9월 장용영 곡관(穀官)이                          되어 입시하니 왕이 말하기를 사성을 교시했는데 모두 고쳤느냐  하니 구시창은 확실한 문적                          이 없어 고치지 못했습니다 하니,  왕은 도재조  채제공(蔡濟恭)을 통하여  연교문(筵敎文)을                          보냈다.  그래도 문적이 약하다고 더 확실한 문적(文蹟)을 구문(仇門)에서 요구하자 정조 22                          년(1798) 6월에 일성록(日省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사성(賜姓)을 명(命)하는 기록                          을 하고 확증지었다.

구형윤(具亨允) 구명윤(具明允) : 1792년 1월 좌의정(左議政)에 올린글에 “구시창의 지친(至親)이 사는 해서                        지방(海西地方:黃海道)에만 공문을 띄웠는데  仇姓(구성)은 원래 한본 임으로 삼남지방(三南                        地方:忠淸道 慶尙道 全羅道)에도 마땅히 사성(賜姓) 할수 있게 공문을 보내주세요”라 했다.

구운용(具雲龍) 구성윤(具聖倫) : 1797년(丁巳年)에  창원에 사는 운용과 양산에 사는 성윤은 예조정서(禮曹                        呈書)를 올렸는데  “백성의 족보(族譜)는 국사책과 같으니 어찌 중대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글을 올렸으며,  1798(정조22년)에  일성록 승전원일기 등에 등재(登載)함으로  확고한 문적                        (文蹟)을 남겼다.

구 억(具 檍) : 경북 세천(世川) 문중인(門中人)이다.  1797년 정조 21년 창원구씨 정사보(丁巳譜)에 서문을 쓰                      셨는데, 그 내용중에 “우리 창원구씨(昌原具氏)가 어찌 옛 구씨(仇氏)를 잊을까 보냐” 라는 글                      을 남겼다.

구명택(具命宅) : 자(字)는 사안(士安).  행랑청(行郞廳) 근무  1756~1818 정사보(丁巳譜)를 편찬하는데 재력                          이 중도에서 떨어지니 개탄하며,  선대의 소중함을 염려하여 사재(私財)를  출연하여 보책을                          완성하는데 보탬이 되게 한다는 발문(跋文)을 남겼다.

구상인(具祥仁) : 초휘(初諱) 시홍(時弘)  1792~1874  가선동추(嘉善同樞) 경희궁(景熙宮) 위장(衛將)을 역임                          했다.

구옥연(具玉淵) : 1822~1900.  高宗朝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약장군(宣略將軍),  가배양만호(加背梁萬戶)를 지                         냈고,  1884년 고종 21년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난민구제에 진력하여,  고을백성들의 칭송                         을 받았다. 페허상태인 고려 때 중건된 고찰 우곡사를 중수하는데, 많은 사재를 희사(喜捨)한                         공덕으로 영정(影幀)을 지금도 봉안하여 그 유덕을 기리고 있다.

구익환(具翼煥) : 호(號)는 화봉. 1838~1904. 자헌행예문관(資憲行藝文館) 겸 경연춘추관사(經筵春秋館事)를                          역임하셨다.

구동조(具東祚) : 호(號)는 일노당(一勞堂). 1858~1927. 통정비서원승(通政秘書院丞)을 증직(贈職) 받으셨다.

구용규(具龍圭) : 호(號)는 묵암(黙菴). 1805~1885.  일성록(日省錄)에 오위장군을 기록이 있다.  절충장군(折                          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 겸오위절충장군(兼五衛折衝將軍), 부호군첨지(副                          護軍僉知), 중추부사(中樞府使) 겸 오위장군을 역임하고,  돈영도정(敦寧都正)을 증직받으셨                          다. 전북 순창문중(淳昌門中)

구대혁(具大赫) : 자(字) 성여(聖汝). 1809~1862.   1840년 헌종(憲宗) 6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기위무과(騎衛                          武科)에 올랐고 부선전(副宣傳)을 지내셨다. 노후에 고향에 학교를 설립하셨다.

구창석(具昌晳) : 배(配) 경주최씨(慶州崔氏) 열행정여(烈行旌閭). 고종 41년 제조(提調) 김태제(金台濟) 정여                          기(旌閭記)에 의하면 남편이 병을 얻어 위독할 때 자신이 대신 죽기를 빌었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바쳤으나 운명했다. 최씨는 기절을 하였다가 소생하였으나, 한달이 지나고 남편이 운명                          한 같은 날 같은 시에 목욕하고 옷 갈아 입고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었다.

구재휴(具在烋) : 호(號) 국사(菊史). 1872~1949. 갑자보(甲子譜) 간행 때 교정을 보셨다.

구상운(具祥運) : 1880년 고종(高宗) 17년 예조당상관(禮曹堂上官)이 시행한  향탄산(香炭山: 陵園墓)에 공급                          하는 松炭을 확보하기 위해지정된 산)을  사찰림(寺刹林)으로 지정하고 향탄산 수호사찰 중                          수에 공노가 크므로 교지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증직받으셨다.

구해용(具海龍) : 자(字)는 선약(善若). 1839~1909. 조봉대부(朝奉大夫)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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