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별게시판
강명문중
담안문중
동래문중
두릉문중
말산문중
물금문중
밀양문중
봉성문중
부산화수회
사상문중
사천문중
송산문중
용정문중
의령문중
진해문중
합천문중
회화문중
고산문중
금구문중
김화문중
대구종친회
봉산문중
서울종친회
선산문중
양식문중
2020 년 6 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문중별 게시판
 
작성일 : 15-02-18 10:41
[봉성문중] 함안 봉성문중 이야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3,847  

함안 봉성문중 이야기

                                           구문굉

( 봉성문중, 21세손, 경남고,서울대 졸업, 저서 : 파월 해병대 수기‘불꽃처럼’의 작가)

1929년 고조부 회갑 사진

갓 쓰신 분이 고조부. 맨 뒤편 오른쪽부터 넷째번이 부친. 맨 뒤편 중앙 애기 안으신 분이

조부(장 손자였으나 곧 사망). 그 오른쪽 안경 쓰신 분이 큰댁 면장할아버지.


남 함안군은 옛 아라가야의 땅이다.

가야와 신라가 합병을 했을 때도 오로지 아라가야만이 크게 반대를 해 모두가 어려움을 겪었다는 역사적인 얘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추측컨대 군북면의 구리와 금 그리고 중리의 철광석으로 당시의 부의 척도가 되는 것들은 모두 가지고 있었던 터라 쉽게 다른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을 해 본다.

특히 고분에서 출토된 목간 중에는 “구리벌에서 일벌 관등을 가진 仇陁知(구타지)가 노인 毛利文(모리문)에게 짐을 지게해서 납부했다”는 것이 나와 우리 문중의 얘기 중 일부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함안에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함안 三大姓氏를 趙仇姜(함안 조씨. 창원 구씨. 진양 강씨) 또는 仇趙姜이라고 일컫던 시대도 있었고 그 후로는 趙李安(함안 조씨. 재령 이씨. 순흥 안씨)의 시대로 넘어가 현재에 이른다고도 한다.

듣건 데 아직도 함안에는 옛 우리 문중의 조상 중 위관을 지내신 분의 묘가 긴 세월이 지났는데도 큰 규모 그대로 남아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언제부터 봉성문중이 함안에 뿌리를 내렸는지는 가늠할 수 없으나 실제로도 조구강이나 구조강의 시대가 함안에는 분명 존재했음이 증명되는 것 같다.

또 한편 불과 70여년 전만해도 듣기로는 명절이나 조상의 제삿날이 되면 증조부께서 사시는 큰 자택 마당에 일족들이 서고도 넘쳐 문밖까지 나가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먼저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드리기 전 “민”자 “기”자의 증조할아버지부터 언급을 하고 자 하는 것은 85세로 수를 하신 증조부께서는 6.25 전쟁 때 잠시 부산의 우리 본가에서 모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함안의 봉성문중 중에서도 특히 내 증조부님의 내역을 언급하는 것이 우리 일족의 얘기를 소개하는데 더욱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아서다.

나의 증조부께서는 남매만 계셨는데 동생 되시는 분은 함안 칠원의 윤씨 집안으로 출가를 하셨고 홀로 대를 이어 가셔야 하는 입장에 계셨다.

그러나 당시 봉성 문중이 세도를 이어간 것은 내 증조부의 백부 측 분들이 대를 이어 부를 이루고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증거로는 백부 측 손자들로 왜정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시며 사진 예술을 하시던 분이 계셨는가 하면 일본으로 유학을 하셔 대학을 나오신 분도 있었으니 과히 짐작이 가기도한다. (그러나 두 분께서는 불행하게도 6.25를 전후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나의 증조부께서는 4남 4녀를 두셨고 내 직계 조부이신 “재(載)”자 “동(東)”자 할아버지께서는 그중 차남이셨다. 특이한 것은 장남이신 큰댁 조부께서는 함안면 면장을 하셨고 3남과 4남이신 작은 조부들께서는 지식이 풍부하시거나 강건하신 분으로 평판이 나 있었으나 나의 조부만은 어릴 때부터 매우 특이한 성격을 가지셨다한다.

증조부의 카랑 카랑하고 기가 왕성하신 모습을 닮아서인지 성격이 급하시고 고함 소리가 컸으며 찬물을 자주 드시는 습관도 가지고 계시는 한편 젊어 서 부터 천식을 얻으셔 평생을 콜록거리시며 사신 것도 하나의 특징이셨다.

다만 멋이 있으신 것은 카이젤 수염을 늘 기르고 계신 데다 천식이 있으신 데도 항상 담배를 물고 계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조부로부터 들었던 얘기만으로도 좀은 특이 하셨다.

서당에는 가지 않으시고 처음 생긴 소학교로 달아나 증조부께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는가 하면 소학교로 간 이유는 당시는 시간마다 종을 치는 것이 아니고 곡고(나팔)을 불었는데 그것을 입에 대고 불면 선생이며 학생들이 모두 움직여 그 곡고 부는 재미로 서당에는 가지 않고 소학교로 다녔다고 말씀을 하셨다.

또 함안 군내 마라톤 시합이 있을 때는 언제든 1등은 아예 조부께서 따 놓은 당상이셨고 몸이 빨라 삿갓 여섯 개를 줄지어 놓고 뛰어넘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4남매 모두는 국민학교 시절 모두가 각학년 릴레이 선수로 나가기도 했고 특히 나는 고등학교 시절 경남에서 제일 빠른 단거리 선수 축에도 들었다.

또 나에게 고모할머니가 되시는 네 분들께서는 모두 인물들이 출중하셔 미인 집안으로 소문이 나기도했다. 물론 모두 당시로는 좋은 집안들을 골라 시집을 가셨고 잠시 소개를 하자면 마산의 큰 부자 집이라던가 당시 국내의 번듯한 중학교를 나오신 분이라던가 일본의 이름 있는 외국어 대학을 나오신 분이라던가 일본서 중학교를 나오신 분들께 각각 시집을 가셨던 것이다.

한편 내 조부께서는 진동에 사시는 선비 집안으로 장가를 드셨고 결국 슬하에는 1남(璡자 鉉자) 5녀를 두셨는데 함안 사람들로부터는 진해양반으로 불렸다. (진동으로 장가를 드셨는데 왜 진해 양반인지는 매우 아이러니칼한 역사적인 내용이 있다. 즉 진동이 1904년 노일 전쟁 전에는 진해였다. 그러나 일본이 러시아 함대를 우리 서해로 유인하면서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의 중요 해안을 이름을 바꾸어 지도를 대량 살포했기 때문에 그 일로 진해가 진동이 되고 웅천 지역 일부가 진해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璡자 鉉자)께서는 1910년 한일 합방이 되던 해에 태어 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한 동안 증조부 댁에 얹혀사셨기 때문에 함안 보통학교를 다니실 때도 무척 배가 고픈 시절을 보내셨다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으레 나무를 하러 나가야하셨고 밥이라고는 찰기가 없는 잡곡밥이라 숟가락에 담아 숨을 잘못 쉬면 날라 가는 수도 있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학교에는 도시락은 으레 싸 가시지를 못하셨는데 매일 자기 도시락을 넉넉히 가져와 주는 친구가 있어 주로 얻어먹었는데 어느 날 다른 친구가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 친구의 아버지가 예전에 종을 살았다는 귀 뜸을 해 그 다음부터는 주어도 먹지 않고 딴 전을 부리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어릴 적의 일이지만 함안 보통 학교의 졸업 사진을 보면 마치 중학생들처럼 모두 차림을 하고 있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특히 키가 큰 편이신 아버지께서 교복에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마치 중학생들처럼 모자를 쓰고 계셔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아버지께서는 졸업을 하시자 식민지 수탈을 위해 생겼다는 일본이 만든 동양척식회사에 사환으로 취직을 하셨다.

남들보다 무척 부지런하시고 정직하고 아이디어가 좋으신 것이 장점이셨다는 얘기는 어머니로부터 자주 들었다.

또 고향 사람들의 말로는 일본말을 아주 능숙하게 잘하셔 관부 연락선의 형사들도 일본 사람으로 알았다고들 했다.

아버지께서는 불과 3년이 지나자 그 큰 미곡창고의 열쇄를 관리하게 되셨고 5년 후쯤에는 농감이 되셨다. 보통 개인의 농토를 관리하는 사람은 말음이라했고 관에서 관장하는 총 관리인은 농감이라고 불렀다.

특히 중요 업무는 수를 메기는 것이었는데 그 뜻은 수확량을 판단해 확정을 하는 것이었고 이것이야 말로 소작인들의 삶을 좌우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대로 땅으로 치부를 했던 지주들의 말음은 소작인들을 두고 온갖 멍에를 지우곤 했지만 농감의 자리는 조직이 크다보니 다소 여유가 있어 소작인들로부터 크게 인심을 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께서는 농감이 되시기 전인 18세 되던 해에 같은 나이의 어머님과 결혼을 하셨다.

어머니는 마산 분이셨고 마산의 환천 상회(마루땡)의 8남매 중 맏딸이셨다. 그리고 당시 환천 상회는 열대가 넘는 트럭을 가졌었고 여수의 재제소와 전북 임실군 오수의 전라도에서 두 번째 가는 큰 양조장도 가지고 계셨으며 이 재산의 원천은 구마산 선창 가까운 곳에 매갈이 도정공장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었다고 한다. (현미 도정을 매갈이라 함)

어머님의 말씀으로는 시집오시기 전 시가의 성씨가 구씨라 어릴 때부터 알고 계셨던 마산의 제1갑부 구연팔씨가 생각나 구씨는 모두 부자들인 줄 알고 은근한 기대를 가지셨다는 말씀도 우스개 소리로 가끔 하셨다.

결국 부모님은 슬하에 11남매를 낳아 7남매를 대부분 홍진에 잃으시고 4남매만을 건져 실로 “하늘은 다는 주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했는데 특히 나는 당시 일본 의사들이 있는 진주 도립병원과 마산 도립병원을 들락거리다 결국 포기를 하다시피 했었는데 최후로 마산 도립병원에서 목에 주사를 맞은 후로 기적같이 생기를 도로 찾아 모든 식구들이 무척 기뻐했다는 말씀을 부모님들로부터 들었다.

그리고 이미 할아버지를 위시한 우리 가족은 함안 읍내에서 가야면으로 이주를 해 새 터전을 잡았다. 지금은 읍이 된 가야는 당시 방목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어머님의 말씀을 빌리면 기차역 부근과 지금의 장터에는 아예 집들이 없었고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소나 염소를 방목해 기르는 장소였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농감을 몇 년 하신 후 퇴직을 하시고 돈을 모아 가야에서 장사를 시작하셨다.

당시 “영일 상회”의 사진을 보면 꽤 큰 가게로 보였는데 즐비한 사기그릇들하며 농기구하며 자전거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풀씨농장의 전경과 아버지  


그러던 중 행운의 여신은 아버지께도 다가왔다.

어느 날 우연히 우체국 앞을 지나시다 마당에 쌓아놓은 화물들을 보셨다.

얌전하게 쌓아 놓은 물건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가 궁금하셨다. 후일 아버지 사람이 되셨지만 당시 변씨라는 우체국 직원에게 물어 보았다. 내용물인즉슨 일본 사람들이 풀씨를 수집해 일본으로 가는 것들이라 했다.

아버지께서 곧 수출 단가를 물어 보고는 깜짝 놀라셨다고 했다.

물론 당시는 일본도 한국도 화학 비료가 거의 없는 때여서 헤아리베치나 자운영을 심어 그것을 퇴비로 써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농사에는 꼭 필요한 물건이었지만 그렇게 높은 가격으로 수출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고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곧 수입상의 주소를 물어 만약 내가 수출을 하게 되면 30%의 단가를 깎아 수출을 하겠노라고 샘플과 함께 편지를 띄우셨다.

답이 없었다. 두 번, 세 번째 편지를 보내고서야 겨우 답이 왔다. 허락은 하되 소량을 우선 보내 보라는 답신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된 아버지께서는 결국 계속 경쟁사를 누르고 거래량을 늘려 나가셨다.

우체국 옆에는 거의 붙다시피 한 초가집이 한 채 있었다. 더구나 교신을 하는 우체국의 사무실과 초가집의 봉창이 가까웠다. 아버지께서는 교신 담당 변씨에게 당시 받는 급여의 두 배를 주기로 하고 채용을 해 그 초가집에서 기거를 하도록 주선을 해 주고는 상대 회사의 교신 내용을 모두 해독하게 해 결국은 독점을 하는 입장이 되셨다.

물론 사업이 크게 되시자 농장을 직영하셔 헤아리베치와 자운영의 씨앗을 직접 채취했고 그 규모는 내가 사진을 통해 보아도 끝없이 핀 꽃들뿐이었다.

이 당시 있었던 지난 얘기를 외가 이모님들의 말씀으로 옮기면 아버지를 조선의 유망 청년사업가라고 세 곳의 신문에서 취재를 해 소개를 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만석꾼이 된 아버지

1938년경 아버지께서는 동양척식회사로부터 농장을 사셨다. 이름은 남월 농장이라 하셨고 소출은 모두 8천석 정도였다. 물론 남월 농장 외 많은 토지를 가지셔 명실 공히 만석꾼의 반열에 오르셨다. 그때 아버지의 연세는 불과 30세를 목전에 두고 있을 때였다.

남월 농장은 당시 금액으로 약 1백35만 엔이었다.

당시 시골 유지인 초등학교 교장의 봉급이 48원 정도였을 때의 일이니 큰 금액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다른 운명의 장난이 앞을 가로막고 있을 줄을 아버님께서는 미처 모르고 계셨다.

즉 어느 날 아버지께서 갑자기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를 당하셨다. 영문을 모르시다 취조 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는 쌀을 통제하고 있던 시기로 아래 사람들이 약간의 쌀을 빼서 거래를 하다 경찰에 체포 된 것을 꼬투리삼아 농장주를 구속하게 되었다니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사건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경찰 서장이라는 자가 불러 마주보고 앉더니 소위 엉뚱한 제안을 하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일본의 신흥 부자 3형제가 조선에 농장을 사기 위해 여러 곳을 물색한 결과 남월 농장이 가장 적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경찰 서장과 음모를 한 후 아버지에게 올가미를 씌워 강제로 남월 농장을 포기해 매도를 하도록 각본을 짰던 것이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1년 농사를 끝으로 그만 남월 농장을 일본인에게 매수했던 가격과 같이 1백35만 엔에 강제 매도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후일 일본인들은 하원준씨에게 크게 프레미엄을 붙여 농장을 되팔았고 이후 함안농장이 된 남월농장은 하원준씨에 의해 경영되다 소작인들과의 마찰로 긴 세월 소송을 했었다)

평소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께 아이들 교육을 생각해서라도 그리고 사업의 더 나은 모색을 위해서라도 도회지로 옮겨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고한다.

필자가 태어난 함안 가야 중짐지의 2층 양옥집 


그리고 내가 가야 중심지 도로변의 이층 양옥집에서 태어 난지 불과 3년쯤 되었을 때로 기억 된다. 식구들은 그 집을 팔고 높은 동네 언덕 위에 크게 기와집을 지어 이사를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로부터 그곳을 먼당이라고 불렀다.

1945년 6월경 그러니까 해방이 되기 직전 아버지께서는 부산에 위치한 2천여 평되는 서대신동 전차길가의 구라하시라는 공장을 사셨다.

구라하시는 아버지와는 친분이 있었던 일본 소유주의 이름이었는데 매수를 끝내자 바로 해방이 되어 구라하시 사장으로는 매우 다행이었고 아버지로써는 크게 애석함이 묻어난 거래가 되었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께서는 회사 이름을 “한양공사 문 공장”으로 바꾸셨다.

공장 부지의 사방 담 쪽은 제재부와 목공부와 목재 창고의 건물이 길게 붙어있었고 가운데는 큰 정원이 들어서 있었다. 그리고 한쪽에는 사무실이 붙은 큰 가정집도 있었다.

이 공장은 제재를 하고 난 나무들을 다듬는데 모두 반자동 기계를 이용하게 되어있는 것이 특징이었고 이러한 공장은 조선에는 두 곳 밖에는 없다고 했다. 특히 일본식 실내 다다미방과 방 사이 상측 문틀들은 매우 섬세한 모양들로 꽃이나 새들로 조각되다 시피 되어있어 작업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신기한 전기톱도 많은데다 마치 어린 내 눈에는 마술 같아 보이기도 했다.

우리 가족이 함안 가야로부터 조부모를 떠나 부산에 이주를 한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그러고 당시 마산고녀를 다녔던 넷째 고모와 중학교 시험을 쳐야했던 막내 고모는 함께 부산으로 와 두 분 모두 부산여고에 다니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읍내에 큰 술도가를 하시던 막내 조부의 장남이신 당숙께서 마산중학교에서 경남중학교로 전학을 오셔 두 고모님과 2남 2녀의 우리 식구와 모두 합쳐 함께 생활을 하셨다. (당시 우리 집을 드나들던 당숙의 친구 분 중에는 김영삼 대통령도 계셨고 나의 당고모부가 되신 분도 계셨고 내 매형이 되신 분도 계셨다. 애석하게도 현(鉉)자 옥(鈺)자 당숙께서는 고려대학을 다니시다 6.25때 행방불명이 되셨다)

한편 큰 조부 면장 할아버지의 둘째 아드님이신 용(龍)자 현(鉉)자의 당 숙부께서는 아버지께서 부산의 제2상업(부산상고)과 2년제 경성사범을 다니시는데 그 뒷바라지를 하셨다.

해방이 되어 경성 사범이 서울대 사범대학이 되자 2년을 더 수학을 하시게 되셨고 그로인해 명실 공히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제1회 졸업생이 되셔 후일 교장과 문교부 장학관. 서울시 교육위원회 학무 국장 그리고 부산시 교육감을 두루 거치시고 나중에는 부산에서 국회의원을 지내셨다.


격동시대 사업가로 활동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미군정 시절 부산 송도의 일본인 별장들을 미군 장교들이 쓸 수 있도록 서양식에 맞게 리모델링하는 큰 공사를 맡으셨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공장이 넓어 한편에 경남 자동차학교를 설립하셨다.

당시 자동차 학교는 1년 과정이었고 졸업을 하면 중학수료의 자격을 주는 것으로 인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일생 중 두 번째 큰 시련의 구릉은 해방 직후 만주에서 사업을 크게 성공을 하고 돌아오신 내 둘째 외숙부와 신한공사(해방 후 일본인들의 부동산을 관리하던 정부기관)로부터 창원 북면의 2천석짜리 농장을 매입한 일로부터 시작 되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들이 농민과 노동자들에 주로 붙어 기생을 하고 특히 구라파의 동구권이 먼저 이에 대한 정책의 일환으로 토지개혁을 단행했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정세의 분위기에 따라 1949년 우리 국회에서도 유상매입(지주에게 지가 증권으로 5년 분할 상환) 유상분배의 토지 개혁법을 통과 시켰다.

바깥세상을 잘 몰랐던 지주들은 그 큰 농토를 몇 장의 지가증권과 바꾼 신세로 전락했는가하면 곧 닥친 1950년의 6.25 전쟁으로 매년 200%~400%의 인프레이션에 의해 그 가치가 또 한 번 땅에 떨어짐으로써 더 큰 슬픔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6.25 사변이 나자 함안의 우리 일가와 마산에서 살던 우리 일가는 모두 한동안 부산의 우리 공장에서 모여 살게 되었다.

창고가 많고 명색이 목재 공장이라 창고 내부를 11 세대가 기거하는 방으로 만들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이 당시 우리 식구들은 처음에는 전차 길을 하나 사이에 둔 동대신동의 과거 구라하시공장 사장의 저택에 살고 있었으나 후일 농림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하신 정재설씨에게 팔고 이사를 해 서대신동의 공장에 붙은 꽤 큰 가정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 난리 통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고조부와 고조부를 수발하시는 할머니 한분이 우리와 한 집에 계시는 것이었다. 특히 아들 손자 고손자 그리고 딸들과 며느리와 사위들이 받드는 분위기 속이라 모르긴 해도 내 증조부께서는 비록 피난생활이긴 했으나 마냥 흐뭇하셨으리라 추측 된다.

수복이 되어 일가들이 모두 고향을 찾아가게 되자 아버지께서는 그 큰 공장이 피난민 수용소로 그리고 전시 육군 통신학교로 징발되는 것이 복잡해 재산을 잠시 정리하셨다.

우선 한양공사 문 공장은 매도를 하셨고 그동안 영주동 인근의 전차길가에 임대를 하셨던 긴 2층 건물과 그 뒤편의 기와집 그리고 맞은 편 공터에 이미 건물을 지어 이사를 한 경남 자동차 학교의 경영만을 염두에 두시고 이사를 결심 하신 것 같았다.

어느 날 나이가 아버지보다 많아 보이는 어른 한 분이 찾아 오셨다.

듣기에도 말씨가 일본서 오신 것 같았고 앉거나 행동을 하실 때도 몸가짐이 마치 일본 사람 같으셨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아버지는 말씀을 함께 올리시지 않고 낮추어서 마치 우리 아이들에게 하는 말처럼 큰 소리를 내시면서 꾸중을 하시는 것처럼 하셨다. 나중에 사 부모님들의 말씀을 들어 보니 그 분은 해방이 되어 일본에서 일본인 부인과 함께 별로 재산이 없이 귀국을 하셨는데 하도 아버지께 사정을 해 부산 송도 해수욕장에 있는 아버지의 500평 대지에다 아무 조건 도 없이 요식업을 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분이 우리 구씨 집안분인데다 아버지께는 아주 먼 조카벌이 되셨다고 하셨다.

마침 그분은 6.25가 벌어지고 임시 수도가 부산이 되자 경기가 날개 돋친 듯 해 시설을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막상 투자를 하자니 자기의 땅이 아니어서 불안하기도 해 아버지께 달리 사정을 하러 오신 것이었다.

즉 땅을 양수를 하되 현금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자기가 돈을 벌면 옆에다 100평정도의 별장을 지어주겠으니 도장을 찍어 달라고 사정사정을 하신다는 것이었다.

결국은 남도 아닌데다 귀찮다보니 그만 그 약속을 믿고 아버지께서는 땅을 넘겨주셨고 그런데도 그 후로는 쓰다 달다는 말 한마디 없이 아예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이 꽤나 흐른 후 그러니까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으니까 1957년으로 기억 된다.

나는 아버지를 따라 그 송도의 요리 집에 갔다. 아버지께서는 요리 집으로 들어서 방에 앉자말자 주인 오라고 고함을 치셨다. 마지못해 나온 것처럼 보인 주인에게 다짜고짜 야 임마! 하시고는 야단을 치셨다. 말씀인즉슨 그래 내가 그렇게 도와주고 요지에 있는 땅도 500평이나 넘겨주었는데 아예 소식도 끊느냐는 말씀이셨고 또 약속한 별장은 어떻게 됐느냐고 호통을 치셨다. 마냥 그분은 고개를 조아리며 좀 더 기다려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결국 그 일은 얼마 안 있어 그 분이 작고하시는 통에 한 푼의 보상도 없이 그저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던 것이지만 그러나 지금도 내가 이해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큰 재산인데도 어머님이 크게 아버지를 핀잔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고 또 1964년 대연동에 만 여 평이나 되는 임야를 남의 사업에 근저당 설정용으로 보증을 섰다 넘어 갔을 때도 물론 큰 말씀이 없으셔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든 대목으로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1951년은 아버지께 매우 분주한 한해였다. 우리가 세를 준 긴 이층 건물에는 제일화재 보험회사가 오래 동안 세를 들어 있었고 아버지께서는 많은 시간을 곧잘 그 사무실의 노 상무라는 분을 만나 무슨 얘기를 하시는 것으로 보내셨다.

그리고 우리 집에는 이미 한해 전 남의 식구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함안에서 “신 타고 다니는 박노일”이라는 케치 프레이즈로 매번 국회의원에 떨어지시는 고향 지인이 자주 오셨다.(후일 도의원을 하셨다)

한 날은 서울서 피난을 온 외무부 차관이 계신데 식구가 없어 방 한 칸이면 되니 자네 집 뒤편 쓰지 않는 방을 치우면 안 되겠느냐고 하셔 아버지께서는 쾌히 승낙을 하셨다.

그러나 운전기사며 호위 경찰관이며 일하는 조카와 조카며느리며 부모를 잃은 어린 외손자며 딸린 식솔이 많았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차관 내외분과 어린 외손자는 뒷방을 쓰게 하시고 조카며느리는 우리 집 여자들이 쓰는 방을 함께 쓰게 했다. 또 집으로 들어오는 넓은 공간에는 새로 방을 넣어 나머지 남자들을 모두 그곳에서 기거하도록 배려를 했다.

(당시 외무부 차관이셨던 조정환 할아버지는 미국 베리아 대학 출신으로 후일 외무부 장관을 하셨고 피난 시절인 1953년1월 경남고등학교의 졸업을 앞둔 내 형님을 미국의 자기 친구를 보증 서게 하여 유학의 길에 오르게 하셨다)

결국 아버지께서는 보험회사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어머님께 설명을 하셨고 엄청난 자본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설명을 하셨는데 현금으로 가지신 것과 자꾸만 가치가 떨어져 가는 토지개혁 때 받은 지가증권으로 자본금을 불입하면 오히려 이익이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을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제일화재의 노 상무라는 분으로부터 얻은 지식으로 일본으로 가셔 일본의 보험업에 대한 지식도 쌓으셨다.

   

1952년 안보화재 설립 당시 사진. 왼쪽 두 번째가 부친


그 후 1951년에는 드디어 화재보험회사의 허가를 재무부로부터 얻게 되셨고 1952년에는 당시 한국 화재보험회사 중 최대 자본금 16억 환을 가진 안보화재 보험주식회사를 탄생시키셨다.

그리고 처음의 대표이사는 공동 대표이사였는데 사장은 왜정 때 고등문관 시험을 패스하고 울산 군수를 지내신 임헌평 당시 변호사를 모셨고 아버지께서는 공동 대표이사 부사장을 하셨다.

그리고 특이 한 것은 그 큰 자본금의 회사가 말이 주식회사지 실은 아버지의 단독 회사였기 때문에 그런대로 장점도 있었지만 사실은 큰 약점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인플레이션이 너무 심해 재무부에서는 매년 지급 보증금을 더 올려 불입을 하도록 했기 때문에 어느 보험회사 할 것 없이 매년 3월이면 허덕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고 특히 혼자 하시는 아버지의 입장으로써는 더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또 사업을 시작하시자 부산 국제시장의 대화재 그리고 역사에 남을 부산 역전 대화재는 매우 회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 저러한 일들을 잘 극복한 나머지 안보화재 보험회사는 1953년 서울 환도 시 이전을 해 종로의 장안빌딩에 안착을 했다.

그리고 서울 효자동에는 한옥 집을 한 채 사 당시 서울대 사범대학을 다니던 막내 고모와 마악 이화 여대에 입학한 내 누님이 함께 기거를 하고 아버님은 서울과 부산을 오르내리셨다.

물론 경남 자동차 학교는 호황기가 끝나 다른 사람에게 양도를 했으나 휴전 직후 대한 석탄공사에서 소유하고 있던 “천진 부선” 13척을 경쟁 입찰에서

인수를 하셨기 때문에 서울이나 부산 중 한 곳에만 오래 머물 수 없는 처지셨기 때문에 오르내리지 않으실 수도 없었다.

천진 부선은 쇠로 된 철부선이며 13척 모두가 250여 톤 전후들의 중국 배였으나 해방 후 한국에 와 있다 공산국가가 된 중공에 돌려 줄 수도 없는 처지라 결국 대한석탄공사의 재산이 되어 계속 석탄이나 잉여 농산물을 나르는데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철부선 13척은 우리집안의 바로 눈물의 씨앗이 되어 만고에 아버지의 존함 석자가 대 사업가로써의 끝을 고하게 되고 마는 계기가 된다.

한편 아버지께서는 최초의 재보험 회사도 허가를 득하게 되며 일본으로 건너가 산업 스파이를 시켜 자동차 보험의 노하우도 빼내 한국의 첫 자동차 보험도 함께 영업을 시도하셨다.

왜냐하면 우선 국내 공무원들이 자동차 보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허가를 득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보험에 대한 설득과 서류가 우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자동차 보험은 현실 감각이 없으셔서인지 곧 접으시고 말았다.

이유는 당시만 하더라도 자동차에 대한 정부 부처의 업무 일원화가 되지 않아 현실성이 없는 것을 나중에 사 아셨다고 했다. 즉 내무부가 관장하는 부문이 있는가하면 교통부도 관장하는 부문이 있는데다 차 적도 제 각각이며 차종 자체도 구분이 되는 차는 적고 안 되는 차가 많아 난관이 많았던 것이 문제였다고 하셨다.

이러던 중 일본을 다니시면서 일본이 6.25의 덕분으로 크게 공업이 성장하여 철이 모자라는 판국이라는 것을 아셨다. 당시 우리가 부산의 외곽으로만 나가도 전쟁터에서 가져다 쌓아 놓은 고철 무더기가 많이 눈에 띄었고 심지어는 서로 화학 반응을 일으켜 연기가 풀풀 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을 매우 미워하시던 이승만 대통령께서 절대 고철이 일본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리시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고철이 아닌 천진부선 13척을 일본 측에 주되 바터제로 선박을 짓기 위한 자재를 가져 오시겠다고 했다. 이 허가는 너무 엄해 결국 당시 경무대 경찰의 곽씨에게 금덩어리를 주고 1년 여 만에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는 신바람이 나셔 부산으로 급히 내려 오셨다.

그러나 뜻밖의 일이 벌어져 있었다. 임원들에게 배를 임대하지 말고 모두 항구에 메어 놓으라고 엄명을 하셨건만 이미 300톤 가까운 철부선 하나가 임대로 나가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급히 수배를 하고 있던 차 며칠 후 먼저 동아일보의 사회면에 해양 경비대 선박의 사진과 함께 크게 실린 기사가 바로 없어진 우리 철부선의 사건이라는 것을 아셨다.

내용은 밀수꾼들이 아버지 회사로부터 철부선을 임대하여 해양경비대와 짜고 그 철부선을 당시 평화선으로 끌고 가 일본의 밀수꾼들에게 인계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이 청천벽력 같은 얘기는 내 자신 평생 하기도 싫어하고 잘 하지도 않던 얘기지만 기어이 말을 하자면 그 이유는 당시 배를 빌려준 회사의 임원들이 바로 아주 가까운 일가요 친척 되시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한편 수출하기로 한 경무대의 허가도 수포로 돌아가 다시 처음부터 허가를 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처음 수출하기로 한 배 5척은 모두 톤수와 이름이 있기 때문에 다른 배로 대체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고 그런 후 다시 허가를 받았을 때는 1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그 동안 일본에서는 고철의 품귀가 너무 심해 미국으로부터 크게 지원을 받게 됨으로 이미 일본의 국내 고철 가격은 전에 비해 너무 하락해 있었다.

이로 인해 결국은 운이 없어서인지 배도 여러 척 동해안에 가라앉았고 그나마 남은 배들은 국내에서 형편없는 값으로 모두 처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55년에는 아버지께서 안보화재 보험회사도 대한 잠사회에 매각을 하셨다.

당시 대한 잠사회는 대 주주가 부산의 김지태씨였다. 물론 몇 년 후에는 안국화재와 합병을 하고 그 후는 삼성화재로 거듭나게 되지만 지금도 인터넷에 들어가 삼성화재를 치고 1950년대의 역사를 보면 삼성화재의 최초 역사가 안보화재로부터 시작 된 것과 설립자가 한 때는 함안인 具璡鉉으로 나오던 것이 지금은 재단법인 훈세사 具璡鉉으로 되어있는 것이 나온다.

이후 아버지께서는 잠시 잠시 숨에도 차지 않으신 작은 사업은 하셔도 과거처럼 크게 벌리는 사업은 하지 못하셨고 큰 사업의 실패로부터 얼주 13년쯤을 가지신 것을 없애며 사셨다. 노년이 되신 후에는 결국 미국에서 귀국하신 형님(영록 박사)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으셨다.

(형님께서는 부모님께서 돌아가신 후 향년 67세로 다소 일찍 소천 하셨지마는 누구보다 많은 저술을 남기셨고 61세로 서울대 교수 재직 당시는 국제 정치학자로써 최연소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셔 큰 영광을 안으시기도 했다. 특히 사회 인문학 계통의 세계 최고 연구소인 미국의 우드로 윌슨 연구소의 연구원을 하셨던 것은 물론, 후일 이곳에서 세계 석학들의 업적을 심사하는 심사 위원을 위촉 받으셔 한국 학자로써는 최초로 그 영광을 안으시기도 하셨다.

학술원은 거의 모든 나라에 있으며 각 분야 최고봉의 학자들이 선발되기 때문에 굳이 말을 하자면 개선된 현대의 대제학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천추의 한이셨던가?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전 가족들 몰래 편찮으신데도 불구하고 80의 노구를 끌고 함안의 남월 농장을 착취한 일본의 3형제를 찾아 동경으로 가셨다.

그들은 일본 중견의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고 3형제 중 위의 둘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막내는 92세에 이르러 그래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고 한다. 매우 반가워하면서도 당시의 책임은 위의 형님들이 했던 일이라 자기는 모르는 바라고 발뺌을 하면서 이왕 먼 길을 왔으니 우리 돈으로 쳐 5백만 원을 내 놓으며 여행을 하고 가라는 말로만 위로를 하더라는 말씀을 후일 나에게 들려주셨다.

아버지께서는 노년에도 이러저러한 작은 일들이 많으셨던 것 같았으나 부모님 모두 작으나마 번듯한 아파트에서 형님의 보살핌과 효를 다하시는 형수님의 지극 정승으로 생활에는 전연 불편함이 없이 사셨다.

다만 내 자신은 부모님께 효도를 하지 못한 채 곡예 같은 삶을 살아 지금도 매우 후회스러운 마음이 부모님을 생각할 때마다 먼저 앞선다.

애석하게도 어머님께서는 교회에 새벽 기도를 가시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80세에 수를 다하시었고 교회 집사셨던 아버지께서도 이듬해 81세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생전의 어머님과 필자



2015년 2월 차남 구문굉 씀.


관리자 15-03-01 20:38
 
글을 읽어신 회원님들은 소감이나 더 알고 싶은 내용 등
 댓글을 쓰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관리자
 
 

번호 제   목 글쓴이 날짜 조회
공지 [두릉문중] 두릉문중 야유회 실시 관리자 06-12 3090
공지 [두릉문중] 두릉문중 야유회 실시 관리자 06-10 2853
공지 [봉성문중] 함안 봉성문중 이야기 (1) 관리자 02-18 3848
공지 [송산문중] 월남 참전 수기 - 구재운 관리자 03-27 5540
공지 [동래문중] 창원구씨 동래문중지 발간 후기 관리자 10-01 4014
공지 [송산문중] 고성 명사록에 실린 창원구씨 (固城名士錄 昌原具氏) 관리자 09-02 3954
공지 [송산문중] 송산문중 이야기 (1) 관리자 08-16 4544
38 [사천문중] 봉귀룡제 (1) 화개장터 05-07 423
37 [송산문중] 고성신문에 실린 <월봉 구상덕 선생의 승총명록> 관리자 09-23 6643
36 [동래문중] 안녕하십니까 3333 07-14 1639
35 [두릉문중] 두릉문중 야유회 실시 관리자 06-12 3090
34 [두릉문중] 두릉문중 야유회 실시 관리자 06-10 2853
33 [선산문중] 2015년11월 선산문중 모사 구성근 11-25 1699
32 [동래문중] 대종회 행사 사진 및 오디오 족보 입니다. 링크를 크릭하십시요 (2) 明星 11-13 1294
31 [사천문중] 능화문중지 발간위원장님 인사 明星 11-11 1425
30 [사천문중] 사천능화문중 정기총회 및 야유회 개최 관리자 06-08 1841
29 [송산문중] 요리하는 젠틀맨 (1) 관리자 02-18 1564
28 [봉성문중] 함안 봉성문중 이야기 (1) 관리자 02-18 3848
27 [합천문중] 두류산을 노래한 옛시 (1) 막수동인 05-08 2247
26 [사천문중] 재경 능화문중 야유회 관리자 05-04 2400
25 [합천문중] 미수 이인로의 두류산 청학동 시 막수동인 04-04 2907
24 [송산문중] 월남 참전 수기 - 구재운 관리자 03-27 5540
 1  2  3  
홈으로 | 인사말 | 인터넷족보열람 | 창원구씨의유래 | 문중별게시판 | 자유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