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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중별 게시판
 
작성일 : 13-08-16 22:04
[송산문중] 송산문중 이야기
 글쓴이 : 관리자
조회 : 4,544  

송산문중(松山門中이야기

송산문중 도송 구재운 

  • 창원구씨(昌原具氏집성촌(集成村송산문중(松山門中)은 경남 고성군 거류면 송산리로 고성읍에서 동쪽으로 약4km 떨어진 고성산(固城山)으로 지정된 거류산(巨流山 570m) 남향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남서쪽으로는 고성평야가 질펀하게 속시개 간척지와 연결임진왜란 때 격전지로 유명한 당항포에 이르고바로 남쪽에서 통영군과 구역을 나누는 벽방산(650m)의 정상이 우러러 보고 있는 천혜(天惠)의 자연환경 속에서 대대(代代)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뜻에 따라 농업을 천직으로 삼고 사는 소박한 농촌 사람들이다.

  • 1930년도 국세조사에 의하면 창원구씨(昌原具氏)는 경남 창원에 130여 호함안군 함안면 강명리(康明里)135사천군 사남면 능화리(陵花里)에 148고성군 거류면 송산리(松山里)에 170여 호 경남지역 이외에는 전북 금제(金堤)에 65호 등으로 나타나 있어 그 당시로서는 송산문중(松山門中)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집성촌임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면 언제부터 이곳에 정착 하였을까?

  • 시조(始祖고려(高麗문하시랑(門下侍郞평장사(平章事성길조(成吉祖)의 원대계손(遠大係孫)인 중시조(中始祖이조(李朝세종대왕(世宗大王직제학(直提學)이신 종길조(宗吉祖후손들이 창원 동면(昌原 東面)일대에서 거주(居住)한 이후 사원(士元내금위(內禁衛어모(禦侮)장군()의 셋째 아들 명현진사(明賢進士)께서 송산(松山)으로 이주(移住)하시어 주부 응성공(主簿應星公)과 子 모의당(慕義堂()후손(後孫)의 모든 묘소가 이곳 거류산 산록(山麓)에 모시고 있어 지금부터 약 460여 년 전인 1500년경에 정착하여 살면서 1592년 413일 부터 7년간의 임진왜란을 맞아 우리 선조들은 왜적을 물리치는데 모두 앞장서서 왜군과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송산문중에서는 근래 1747년 영조대왕(英祖大王) 34년에 작성된 은정리향약동안(銀亭里鄕約洞案)이라는 귀중한 문서를 발견하여 구자성(仇字性)의 할아버지 친필 성함(姓銜)을 보고 모두들 감탄해 마지않고 있다.이 문서는 이 지역주민들의 향약(鄕約)으로써 은정리(銀亭里)는 과거 산촌정촌월치 마을 등으로 되어 있었으나 왜정시대 행정구역 변경으로 산촌구현 등이 송산리(松山里)로 편입되고월치정촌 등은 은월리(銀月里)로 개칭 되었는데 이 내용을 요약하면 은정리(銀亭里세대주(世帶主) 42명의 명단을 기록해 놓고 관청의 공사원(公事員)이진태(李震泰)가 ()”(서명을 하고 절목(節目)에 16개항(個項)의 규약(規約)을 명시한 다음 역시 관()에서 서명을 하였는데, “첫째 화재로 집이 소실되어 재건축시에는 곡물 4말을 징수하여 보태어 준다.” 를 비롯하여상가(喪家)에 대한 부조(扶助)와 봄가을 정기모임에는 7말을 내고 동()회의에 불참석시는 곡물이나 술을 부담하게 하였으며전답에 물을 균등이 나눠서 넣어야 하며이를 어길 때에는 관()에 보고(報告)하여 벌을 가한다는 등 상부상조(相扶相助및 윤리사항(倫理事項)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생활규범을 명시해 두었다여기 명단에 기록된 42명 중 구자성(仇字姓)이 3명 있는데구후청(仇厚淸十二世祖)와 큰집 장조카 구상신(仇尙愼十三世), 장손자 구봉조(仇鳳朝十四世)로서 이를 추이(推移)해 보면저 유명한 37년간의 생활일기 승총명록(勝總明錄)을 쓰신 월봉(月峯상덕선생(尙德先生)은 구후청(仇厚淸)의 둘째 아들이었으니이 은정리향약동안(銀亭里鄕約洞案)의 명필(名筆)은 바로 월봉처사 (月峯處士)의 글씨임이 틀림 없으리라이것은 1792년 정조대왕(正祖大王)의 교서 (敎書)에 의하여 구자(具字)로 개성(改姓)되기 45년전(年前)의 사실(事實)로서 우리 창원구씨(昌原具氏원성(原姓)은 구씨(仇氏)임이 이 문서로 백일천하(百日天下)에 잘 나타나 있는데도이탈한 몇 후손들은 아직도 깨우치지 못하고 능성구씨(陵城具氏본관(本貫)행사를 하고 있으니 실로 통탄하고 안타까운 일이다송산문중 후손들은 임란(壬亂공신(功臣훈련원(訓練院주부(主簿응성(應星이등공신(二等功臣)과 공()의 자(모의당(慕義堂(양공(兩公)의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정신으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하신 충의(忠義)의 혈통(血統)임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이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있다.

  • 일제하에서 해방이 되자 문중에서는 숭조목종(崇祖睦宗)정신을 되살려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모금운동을 벌여 병풍(屛風)같은 거류산(巨流山)의 품속 양지 바른 곳에 재실(齋室)을 짓고 전국의 유림학자(儒林學者)들로 부터 양공(兩公)의 의거(義擧)를 추모찬양(追慕讚揚)하는 문장(文章)과 시구(詩句)를 받아들이고또한 후손들도 공경(恭敬)의 글과 시()를 지어 현판에 조각하여 올리는데경송재기문(景松齋記文)은 저 유명한 사명대사(四溟大師)의 비문(碑文)을 쓰신 변영만(卞榮晩)선생께서 서울에서 남쪽지방을 구경하면서 진양군(晋陽郡의곡 정사(義谷精舍)에 들려 잠시 머무르고 있을 때십년전(十年前)에 일면식(一面識)이 있는 태환 문장(泰煥門長)이 찾아가 인사하니 지면(知面)의 인사임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니 양공(兩公)의 행장(行狀)을 내밀고 부탁하여중로(中路즉석에서 유려(流麗)한 기문(記文)을 지어주셨으니이 어찌 고맙고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나는 유년시절(幼年時節이 재실 지척에 살면서 많은 추억을 갖고 있다진해(진북고동아저씨 태환(泰煥), 동내 정훈(玎薰학동아저씨가 창이 동그란 중절모에 짧은 회색 두루마기를 입으시고네모난 나무상자의 가방을 들고 시조(始祖성길조(成吉祖)의 실묘(失墓)를 찾아 강원도 영월땅 천리(千里)길을 나서는 모습도 보았고을미보(乙未普수단(收單)과 창원구씨(昌原具氏뿌리찾기 운동을 하시느라 노심초사(勞心焦思)하시면서 건강을 위하여 조석으로 생솔잎차를 갈아드시기도 하시었다이런 와중에 재실 건축비 종중(宗中경비부과에 불만을 품은 일부 후손들이 능성구(陵城具)로 이탈하여 가소(可笑)로운 짓을 자주 하였는데 그 중 가장 불미스러운 사건이 두 가지로써 야밤에 월봉(月峰)선조묘비(先祖墓碑)를 훼손하는 짓거리와 재실의 야간 종중 회의장에 일부 깡패를 동원 급습을 하여 몽둥이를 휘둘러 그날 밤 많은 어른들이 다쳤으니 실로 천인공로(天人共怒)할 만행(蠻行)이라 하겠다집안일이라 숨겨 덮어두고 살았는데남 열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自己自身)의 양심은 못 속이듯이 이제 그들이 회개(悔改)하고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천리(天理)를 따라야 될 것이다.

  • 이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 건축한 재실은 한편으로 동네 문화의 공간이기도 했는데 3개의 방과 대청마루에는 여름철 한낮의 오수(午睡)를 즐기려는 농부들이 가득 찼고야간 및 휴일에는 학생들이 시험공부나 독서를 하는 독서실로도 사용하기도 하고아저씨와 조카가 장기바둑을 두면서 조카가 물려주지 않아 애간장을 태우기도 했으니나는 이곳에서 어깨 넘어 바둑을 배워 어른들에게 4~8점을 붙이고 두었는데타향생활 10여년 후에는 오히려 나에게3~4점을 놓고 두어도 이겼으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이라 하겠다.

  • 이렇게 추억과 애환(哀歡)이 얽혀 있던 이 고가(古家)의 재실은 근년(近年)에 어느 정신질환자의 불장난으로 방화되어 모든 유물과 함께 소실되고 다시 중건 되어 지금은 특별한 행사시 이외에는 항상 대문을 꼭 잠겨 놓고 문중유사가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1967년 지방 사림(士林)의 공의(公儀)에 따라 세칭(世稱일문사충신(一門四忠臣)에 대한 박정희(朴正熙대통령(大統領)의 친필휘호 (親筆 揮毫) ‘창원구씨(昌原具氏사충기적비(四忠紀蹟碑)’ 서본(書本)을 받아 마을 입구에 근수(謹竪하였으며, 1981년에는 재실 뒤편에 사우(祠宇사충사(四忠祀)를 건립(建立)하여 신위(神位)를 모시고 해마다 음() 3月 중해일(中亥日)에 전국 사림(士林들이 모여 향사(享祀)를 올리고 있다.
  • 이 같은 행사에는 전 대종회장(前大宗會長상우 문장(商佑門長)이 앞장서고 수진(秀鎭전 대종회장(前大宗會長)과 온 문중일족들이 일심동체(一心同體)로 물심 양면(物心兩面)의 지원(支援)이 있었음을 부언(附言)해둔다.

  • 송산문중(松山門中사람들은 남산(南山중시조(中始祖시향제(時享祭및 대종회의 행사시(行事時)에는 바쁜 일손도 놓고 한복에 두루마기로 정장하여 창원 덕산(德山)의 백리(百里)길도 멀다 않고 달려와 참배(參拜)하고 종사(宗事)이야기를 듣고 간다지난 4월 28일 사충신향사시(四忠臣享祀時)에는 서울 종회장(宗會長사천문중의 서상(瑞相)씨와 용정(龍井)문중의 진웅씨(辰雄氏)가 처음으로 참관 (參觀)하여 유현한 거류산세(巨流山勢)와 만나는 사람마다 아재형님동생으로 부르며 어디로 가도 일가집이고향사(享祀)에 오신 손님들의 접대를 위해 정성을 다해 뒷일 하는 동내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찬사를 보내며특히 진웅(辰雄)씨는 형님동생촌수를 따지는 문중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우리 일행과 같이 서울로 출발도 못하고 밤늦게야 얼큰해 나왔다니 과연 일가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 송산(松山)문중 집성촌은 60년대 인근지역을 포함 200호에 달했으나 70년대 산업문명의 발달로 물질적 생활이 편리한 도시 집중 현상에 따라 二世들이 고향을 떠나 살고 있어요즘은 채 100호도 안되니 선견지인(先見之人)들은 앞으로 선조 (先祖)의 묘소관리(墓所管理)며 사충신시향제(四忠臣享祀時)는 누가 모실 것인가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그러나 천년(千年)의 창원구씨 혈통 (昌原仇氏 血統)을 이어받은 송산(松山문중 사람들은 훌륭하신 옛 조상의 얼과 체취(體臭)를 느끼면서 그 유업(遺業)을 받들고 오늘이 곧 옛이 될 것을” 생각하면서 숭조목족 (崇祖睦族)의 정신(精神)으로 문중발전(門中發展)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갈 것이다. 

    송산문중 在雲 記

9전10승 15-09-18 10:56
 
과히 우리 문중의 자랑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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